반 사무총장 '임명자'의 숨겨진 일화
반기문(潘基文.62) 제8대 유엔 사무총장 임명자는 어떤 삶을 살아 왔을까.
1970년 외교통상부에 (당시는 외무부) 입부해 36년동안 ’외교’에 전력투구해 온 만큼 그를 따라다니는 일화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다.
초등학교 시절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학교 대표로 낭독하면서 유엔과의 인연을 맺기도 했다.
◇공부벌레..’타고난 외교관’= 반 임명자는 1944년 충북 음성군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반 임명자와 유엔과의 인연은 헝가리 국민봉기가 일어난 지난 56년이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그는 학교 대표로 다그 함마슐트 당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낭독한 ’꿈나무’였다.
고등학교 내내 ’수’만 받은 반 임명자는 대한 적십자사가 주최한 영어 경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데 이어 주한 미대사관이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한국 대표로 뽑혀 미국 땅을 이때 처음 밟고 케네디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반 임명자는 케네디 대통령이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스스럼없이 ’외교관’이라고 답했다”고 상기했다.
반 임명자는 이때부터 진지하게 외교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공부벌레’ 반 임명자는 서울대 외교학과 재학 시절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아 체육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아 우등생으로 선발됐다.
덕분에 반 임명자는 신태환(申泰煥) 당시 서울대 총장이 새로 도입했던 ’우등상 제도’의 혜택을 받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KBS 프로그램 ’수석 졸업생들과의 대화’에 출연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1984년 미국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에서 연수를 받으면서도 반 임명자는 특유의 학습욕을 불태워 졸업식 때 다시 한 번 우수상을 거머쥐었다.
◇’복주머니’로 맺어진 인연..아내의 ’조용한 내조’ = 반 임명자가 부인 유순택(柳淳澤.62) 여사를 만난 것은 그가 충주고등학교 3학년으로 미국을 방문하던 1963년이었다.
이웃의 충주여고 학생들이 반 임명자에게 미국 체류 중 사용하라며 복주머니를 만들어줬고 이 주머니를 반 임명자에게 대표로 전달한 것이 당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었던 유순택 여사였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을 계기로 두사람은 결혼에 골인, 43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해 온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결혼 직전 유순택 여사의 어머니는 반 임명자 부부에게 “남자가 해 지기 전에 집에 오는 것은 직업이 없거나 큰 병을 앓고 있을 때이니 반 서방이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말라”고 유 여사에게 당부했다고 반 임명자는 회고했다.
덕분에 반 임명자는 아내의 조용한 내조 아래 마음 놓고 업무에 매진할 수 있었다. 반 임명자가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지금까지도 유 여사는 밖으로 나서지 않고 반 장관 내조에 전념하고 있다.
◇딸들의 ’비밀 결혼식’ = 반 임명자는 유 여사와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현재 아시아재단 사업부장으로 근무 중인 맏딸 선용(仙蓉.36)씨와 유엔아동기금(UNICEF) 케냐 사무소에서 국제기구초급전문가(JPO)로 일하고 있는 막내 딸 현희(賢禧.31)씨는 모두 비밀리에 결혼했다.
반 임명자는 차관 및 비서관 이외에는 일체로 비밀로 하고 결혼식이 끝난 후에 공지할 정도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했다.
아직 미혼인 맏아들 우현(雨鉉.33)씨는 현재 미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궂은 일 마다 않는 ’우등생’ 외교관 = 1970년 제 3회 외무고등고시를 차석으로 합격한 반 임명자가 1979년 주 뉴델리 총영사관에 자발적으로 간 일화는 유명하다.
맡는 일마다 정확하게 처리하는 데다 성실함을 ’겸비’해 외무부 안팎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반 임명자가 ’험지’인 인도에 발령이 나자 당시 감사관은 너무나 의아한 나머지 그를 불러 자세한 경위를 파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 임명자는 외무부 본부에서 이미 인도를 담당했었고 또 생활비가 다른 근무지에 비해 적게 들어 저축이 가능한 곳으로 가야 고향의 형제들을 금전적으로 도울 수 있다며 뉴델리 근무를 지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에서 반 임명자는 당시 주 인도대사였던 노신영(盧信永) 전 총리를 만났다.이 때 그의 성실함과 우수성이 노 대사의 눈에 띄어 후에 총리로 임명된 후 총리 의전비서관으로 발탁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케네디 스쿨 연수 중이던 반 임명자를 부이사관으로 파격 승진시켜 비서관으로 발탁한 노 전 총리는 그를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관으로 승진시키려 했다.
“아직 차례를 기다리는 선배들도 계시는데...”라며 한사코 사양한 반 임명자가 결국 승진하게 되자 외교부 선.후배와 동기 100여 명에게 친필로 “미안하다”는 편지를 보낸 일화 또한 외교부 내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이야기다.
◇불어.독어도 수준급 = 1975년 외무부 국제연합과 차석으로 시작해 1979년 유엔대표부 1등 서기관 신분으로 처음 유엔 본부에 ’입성’한 반 임명자가 점심 시간을 이용해 불어를 익힌 일화도 유명하다.
반 임명자는 사무총장 선거 캠페인 중 프랑스와 북서 아프리카의 불어권 국가 정상 및 외교장관들과 만나면 불어로 대화하고 연설도 불어로 해 유엔 회원국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불어 실력은 유엔대표부 1등 서기관 시절 탄탄한 기반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 임명자는 불어 뿐만 아니라 독어 또한 연설문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주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할 당시 반 임명자는 짬이 날 때면 독어를 공부해 독어권 대사들과 모인 자리에서 주로 독어로 연설했다고 주변인들은 회고했다.
◇부친 별세에도 슬픔 참고 협상에 매진 = 반 임명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협상이 한창이던 1991년 부친상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협상에 매진했고 공동선언이 채택된 후 아버지 빈소가 있는 충주로 직행했다. 이 사연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모 방송사의 9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2004년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환자가 발생해 반 임명자가 체코에 긴급 기착을 지시하고 체코 주재 대사에게 연락해 응급치료를 받도록 도운 일화도 있다. 환자가 응급조치를 마쳤는지 직접 확인을 한 후에야 다시 서울로 출발했는데 그때 사실 반 임명자 본인은 빙모상을 당한 상태였다.
반 임명자가 자신에게는 무척이나 엄격했던 것은 다른 일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국제연합과 과장을 맡은 1980년 비동맹권 교섭차 인도로 출장을 갔다 장티푸스에 감염된 반 임명자는 도저히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 수일 간의 격무를 소화한 후에야 병원에 입원했다.
◇주요 ’공적’과 그에 대한 전 상관들의 평가 = 1992년 워싱턴 주 미국 대사관에서 공사로 있으면서 반 임명자는 1994년 제네바 합의가 도출되기까지 막후에서 미국을 상대로 상당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1994년 아시아ㆍ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고위대표로 협상에 참여해 우리 농수산물시장 개방과 관련, ’유연성의 원칙’을 도입하는 데 성공해 우리 농산물 시장보호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사로서의 활약상도 빼놓을 수 없다. 1996년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사건이 터졌을 때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었던 반 임명자는 사실상 특사자격으로 극비리에 필리핀을 방문, 타결책을 마련했다.
그는 1998년 주 오스트리아 대사와 주 국제기구대표부 대사를 겸임하면서 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 준비위원회 의장을 6개월간 맡아 외교 업무에 있어 상당히 전문적인 분야에 속하는 핵실험에 대해서도 경험을 쌓았다.
2001년 한승수(韓昇洙) 당시 외무부 장관이 한국의 유엔 가입 역사 상 처음으로 총회 의장으로 선출됐을 때 최측근에서 그를 보좌한 것도 반 임명자였다. 그는 한 의장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유엔 사무국이 평가한 “가장 활동적인 비서실장”으로서의 평판을 쌓았다.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이 때 유엔에서 사귄 ’친구’들이 반 임명자가 당선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그의 지인들은 평가했다.
한 의장이 총회 의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9.11 테러가 발생했기 때문에 반 임명자가 관여했던 첫 번째 의장성명은 바로 테러 규탄 성명이었다.
2000년 이정빈(李廷彬) 전 장관 밑에서 차관을 맡을 때다. 당시 이 전 장관은 “내가 반 차관을 데리고 일할 수 있다니 참 복이 많은 장관이다”라며 칭찬했다는 후문이다.
차관으로 재직하던 1년 동안 반 임명자는 거의 모든 주말에도 공식 일정을 소화해냈다고 한다.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ㆍ’기록제조기’ = 반 임명자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장관직을 맡은 2004년 1월 이래 총 105개국을 방문했으며 재직 기간 990일 중 1/3인 330일을 해외에서 보냈다.
각국 외교장관들과 만난 횟수도 만만치 않다. 반 임명자는 총 321 차례의 외교장관회담에 참가했다.
60세를 넘긴 나이에도 2박6일, 24박26일이라는 가히 ’엽기적’인 일정을 거뜬히 소화해 내 그보다 젊은 보좌진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강철 체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렇게 눈코 뜰새 없는 와중에도 반 임명자는 언론간담회 74회, 외신인터뷰 108회, 국내 언론과 인터뷰 100회 등 언론과의 접촉도 활발히 유지했다.
흥미로운 것은 언론을 능수능란하게 대하는 반 임명자도 곤란해하는 질문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취미, 종교, 그리고 건강의 비결을 물으면 곤란해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 자체가 그에게 가장 즐거운 취미이자 건강비결인 그에게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임에 틀림없다.
◇특별한 인맥관리 = 반 임명자는 또 그만의 특별한 인맥관리 ’비법’으로 유명하다.
그는 1963년 고교 시절 한국 대표로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묶을 곳을 제공해줬던 (홈스테이) 패터슨 할머니와 안내 지도원이었던 터퍼 할머니(워싱턴)와의 인연을 40년 이상 유지해왔다.
은혜를 잊지 않은 반 임명자는 2005년 8월에 패터슨 할머니를 서울로 초청해 극진히 대접했으며 올 9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를 다시 한 번 찾았다고 한다.
‘충주 영어신동’이 지구촌 평화기구 수장으로
집안살림 도우려 美대신 인도근무 자원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 경험이 큰도움
“4남2녀 중 장남인 오빠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로 이름을 날렸다. 동생들에게는 학창 시절 내내 ‘반기문 동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막내 동생 반경희씨·약사)
◆충주의 영어 신동
그중에서도 반 장관의 ‘오늘’을 열어준 것은 영어실력이다. 충주중 시절, 영어교사가 무조건 하루에 배운 것을 10번씩 써 오라고 했다. 반 장관은 매일 같이 그 숙제를 다 하면서 문장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고 1 때는 같은 반 학생을 위한 영어 교재를 만들었다. 반 장관이 상당한 수준의 영어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충주비료 공장 때문이었다. 그 공장엔 미국인 엔지니어와 가족 20여 명이 살고 있었다. “미국인 엔지니어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회화를 가르쳤는데, 충주고의 반기문 학생이 제일 뛰어났다. 그 사람은 영어로 된 것이면 뭐든지 달달달 외우고 다녔다. 거의 미친 사람처럼….”(고향선배 안영수 경희대 교수·여)
충주에서 소문난 영어실력으로 고 2 때 적십자사에서 주관한 ‘외국학생의 미국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됐다. 한국에선 4명을 뽑았는데, 소도시인 충주 출신으로 반 장관이 뽑히자, “충주시가 난리가 났다”(남동생 반기상씨·사업)고 한다. 반 장관이 이듬해 고 3 여름에 한 달 동안 미국을 방문할 때, 충주여고 학생들이 가사 시간에 미국인들에게 선물할 복주머니들을 만들어 전달했다. 이를 대표로 전달한 여학생이 충주여고 류순택(柳淳澤) 학생회장. 류씨는 반 장관이 외무고시에 합격한 다음해인 71년 서울 흑석동의 1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반 장관과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반 장관은 미국방문 당시 워싱턴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외국 학생들과 만났다. 틈틈이 꺼내본 케네디 사진은 반 장관을 외교관, 장관, 유엔 사무총장으로 이끌었다.
◆미국 아닌 인도 총영사관 자원
가세(家勢)가 기울어 고학을 하면서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반 장관은 70년 외무고시 3회 합격으로 외교관이 됐다. 최성홍 전 외교부장관에 이어 2등이었다. 반 장관은 가족들에게 “평생 1등만 해 오다가 2등을 처음 해봤다”고 말했다.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칠 때는 다시 1등을 해, 주미대사관에 발령받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반 사무관은 후진국인 인도(뉴델리)총영사관 근무를 희망했다. 반 장관의 동생 기상씨는 “미국에 가면 저축하기 힘든데 후진국에 가서 돈을 아끼면 집안에 보탤 수 있을 것 같아 형님이 인도를 자원했다”고 말했다.
그의 인도총영사관 근무 자원은 반 장관의 외교관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노신영 주뉴델리총영사(전 국무총리)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 인도와의 수교를 위해 파견된 노 총영사는 햇병아리 외교관의 영어실력, 민첩함, 판단력, 성실함에 주목했다. 73년 한·인도 국교 수립으로 주뉴델리총영사에서 주인도대사가 된 노 전 총리는 공관장 회의에서 반 사무관을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인도 근무를 회상하며, “(앞으로) 나를 도와 많은 일을 하게 된 초면의 반기문 사무관은 신혼 초였다”고 썼다.
노 전 총리는 안기부장을 거쳐 국무총리가 되자 1급이 맡던 의전비서관에 3급인 반 장관을 임명했다. 이어 87년 이사관(2급)으로 초고속 승진시켰다. 그러자 반 장관은 당시 자신의 동기, 선배, 후배 100여 명에게 1주일에 걸쳐서 일일이 편지를 썼다. “일찍 승진해서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
반 장관은 김영삼 정부에서 외교부 차관보?청와대 의전수석?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관운이 좋지 못했다. 주오스트리아대사에서 2000년에야 차관이 됐다. 반 장관과 비슷한 시기에 장관에 임명된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당시 기자에게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반기문이를 차관으로 데리고 장관을 하다니…. 앞으로 장관은 그냥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2001년 반 장관의 외교관 인생 31년 만에 고비가 왔다. 그해 2월 한·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실무진의 실수로, 부시 행정부가 폐기를 주장하고 있던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ABM) 조약의 ‘보존과 강화’를 골자로 하는 문장이 포함돼 버렸다.
한·미 간에 큰 파문이 일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3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후, “내가 이 문제로 미국측에 얼마나 많이 사과를 해야 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정빈 장관과 반 차관이 차례로 경질됐다. 문책인사였다. 불명예 퇴진한 반 차관은 “죽고 싶다. 내가 단 1시간도 나를 위해 쓴 적이 없는데…” 라며 연락을 끊었다. 경희대 안영수 교수는 ‘실업자’ 반기문에게 이젠 “차를 운전해 줄 사람이 없으니 지하철 타고 다니라”며 정기권을 사줬다.
◆전화위복
이런 그를 4개월 만에 한승수 당시 외교부장관이 발탁했다. 한 장관은 자신이 유엔총회 의장이 되자, 그를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 겸 주 유엔대표부대사로 뉴욕에 부임시켰다. 외교부 차관을 한 사람이 겨우 유엔에 가서 국장급이 할 일을 하느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이 자리는 결국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