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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엔사무총장 된 반기문장관의 어제와 오늘

SangBokLee 2007. 11. 10. 10:17
유엔사무총장 된 반기문장관의 어제와 오늘
“고교 시절 케네디 대통령 만나 외교관의 꿈 키웠다.
아내를 만난 것도 바로 그때”

학창 시절부터 외교관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꿈대로 36년간 외교관의 길을 걸었고, 이제 막 외교관으로 오를 수 있는 최정점에 섰다. 한국시간으로 지난 14일 새벽,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선출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개인적 영예를 떠나 전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온 국민이 기뻐해야할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유엔 창설 61년 만에 분단국가 출신의 첫 유엔 사무총장 탄생
반 장관의 UN 수장 임명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 외교

사람들은 반기문 장관(62)이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각국을 대표하는 외교 수장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그는 박수를 받으며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추인됐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 국민은 마치 내 일처럼 기뻐했고, 늘 으르렁대며 얼굴을 붉히던 국회의원들마저도 이날만큼은 당을 떠나 한목소리로 반 장관이 이뤄낸 역사적 쾌거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렇다면 반 장관은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떻게 ‘세계 정부의 대통령’이라는 UN 사무총장 직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한국 외교가의 거울’이라는 평가를 받는 반기문 장관. 그가 35년 동안 몸담은 외교통상부 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이 있다. “반(반 장관)의 반(半)만 해도 제몫은 하는 거다”라는 말이다. 김영삼 정부 때 반 장관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모신 전봉근 외교안보연구원 북한연구부장은 “반 장관의 트레이드마크는 ‘성실성과 공손함’”이라면서 “그는 한국 외교관 사회에선 ‘조용한 영웅’으로 통했다”고 말했다.

전 부장은 “외교관은 업무 이외에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며 “반 장관은 그런 감동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해 대하는 진실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반 장관과 배터리를 이루고 있는 유명환 외교부 제1차관도 반 장관을 “한마디로 나이스하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성품은 외교관 직 수행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대외관계 속에서 철저히 국익을 다투도록 훈련받은 외교관으로서 자존심과 본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지론은 ‘외교관은 일하는 사람’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오해를 살 일도, 원한을 살 일도 없다는 뜻이다. 40여 개 나라의 외교부 장관이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생활태도에서 비롯된다. 폭넓은 교류가 유엔 사무총장 선거 캠페인에도 큰 힘이 됐다.

누구보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호감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권에서 라이스 장관이 속내를 드러내고 막역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반 장관뿐이라고 한다. 이같이 ‘적이 없는’ 반 장관을 영국 BBC 방송은 “지나치게 자제하는 스타일”(10월 2일)이라고 평가했다. 어떻든 늘 국익을 앞세워 제3국 출신의 유엔 사무총장을 지지하던 미국이 OECD 회원국인 한국 출신의 반 장관을 지지한 것 자체도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그의 성품은 노영신 전 국무총리의 눈에 띄었다. 노 전 총리는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자 반 장관을 의전비서관에 임명했다. 당시 1급이 담당하던 관례였던 자리에 3급을 임명한 파격 인사였다. 1987년에는 이사관(2급)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반 장관은 자신의 선후배, 동기 1백여 명에게 “너무 빨리 승진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친필서한을 보냈다. 반 장관을 대미외교의 실무 책임자인 미주국장에 기용한 사람은 최호중 전 장관이다. 그가 ‘미국통’으로 성장하게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차기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현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 사무총장과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후임인 공로명 전 장관도 재직 시절 반 장관을 특별히 중용했다. 외교정책실장에 발탁한 지 5개월 만에 다시 제1차관보로 승진시켰다. 반 장관은 다시 한 달 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발탁되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가 이렇게 상사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일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이정빈 전 외교부 장관은 반 장관을 직속 부하로 뒀다. 이 전 장관은 당시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반기문이를 차관으로 데리고 장관을 하다니…. 앞으로 장관은 그냥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반 장관은 또한 철저한 공무의식으로 유명하다. 그는 김영삼 정부에서 1996년 3월부터 1998년 2월까지 대통령의 전수석비서관과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당시 그를 아끼는 사람에게 “정권이 바뀌면 피해를 볼지 모르니 청와대를 떠나라”는 권유를 자주 받았다. 그는 “공무원이 어떻게 부여된 임무를 거부하느냐”며 지론대로 움직였다고 한다. 2001년 반 장관에게 고비가 왔을 때 일이다.

그해 2월 한·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실무진의 실수로, 부시 행정부가 추진하던 미사일방어체제에 한국이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미국으로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던 ‘심각한 외교 사고’였다. 그 심각성은 ‘그 문제로 얼마나 많이 (미국에) 사과를 했는지 모른다’고 한 김 전 대통령의 회고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차관이던 반 장관이 문책 인사를 당하자 “죽고 싶다. 내가 단 1시간도 나를 위해 쓴 적이 없는데…”라며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반 장관의 관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승수 전 외교부 장관이 제56차 유엔총회 의장이 되자 그를 의장 비서실장(유엔본부 부대사)으로 부른 것이다. 그 자리는 국장급이다. 그는 “국가의 녹을 먹은 사람이 나라의 부름을 저버릴 수 없다”며 뉴욕으로 떠났다. 외교가에서는 ‘장관감인데, 저렇게 공직을 그만두는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유엔의장 비서실장은 IAEA(국제원자력기구)와 UNIDO(국제연합공업개발기구) 등 국제기구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 파견 대사를 지낸 경력과 함께 유엔 사무총장 출마의 밑거름이 됐다.

본부 대사로 뒤로 물러나 있던 반 장관은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보좌관 그리고 한국의 외교 사령탑으로 임명됐다. 노 대통령은 외교적 현안에 대해서 반 장관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만큼 두터운 신임을 보냈다. 그러나 ‘대미자주파’와 ‘한·미동맹파’의 갈등 논란 속에서 반 장관은 적지 않은 속앓이도 해야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유엔의 수장 자리까지 오른 반기문 장관. 유엔 총회의 최종 인준을 받은 반기문 사무총장 지명자는 곧바로 인수팀을 구성해 취임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 새 사무총장의 임기는 내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반 장관은 이후 향후 5년간 UN 사무총장 직을 수행하며 세계 평화와 발전을 위해 앞장서게 된다.

영어 잘하던 공부벌레 ‘타고난 외교관’
‘복주머니’로 맺어진 인연, 아내의 ‘조용한 내조’는 든든한 힘

반 장관은 1944년 충북 음성군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처음 UN과 연을 맺은 건 지난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헝가리 국민봉기가 일어났을 때 당시 초등학생이던 그는 학교 대표로 다그 함마슐트 당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낭독한 바 있다. 그것이 반 장관이 기억하는 UN과의 첫 인연이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열세 살이었던 걸 감안하면 그는 어쩌면 UN 수장이 될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공부 잘하는 아이로 통했다.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청주에 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충주로 옮겨간 반 장관은 학창 시절 내내 1등과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고교 생활기록부를 살펴보면 ‘은’은 찾아보기 어렵다. 3년 내내 올 수만을 받은 장학생. 특히 영어 실력은 신동에 가까웠다 전해진다. 고등학교 때에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재학 중일 때에도, 심지어는 1984년 미국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에서 연수 중에 있을 때도 그는 특유의 학업욕을 불태우며 졸업식 때 우수상을 거머줬다.

그의 아버지는(반명환, 92년 작고)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 내심 의사가 되길 바라셨다고 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맛본 특별한 경험은 그를 외교관으로 성장케 했다. 충주고에 재학 중이던 1962년의 일이다. 그는 미국 정부가 주최한 한 영어웅변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하는데, 당시 부상으로는 미국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렇게 떠난 미국 여행길에서 소년 반 장관은 당시 미 대통령이던 존 F 케네디를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반 장관은 “케네디 대통령이 꿈이 뭐냐고 물었는데 자연스럽게 외교관이라는 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 반 장관의 미국행은 그로 하여금 ‘직업 외교관’의 꿈을 키우게 한 것 외에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의 부인인 유순택 여사를 만난 것도 바로 그가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인 1963년의 일. 반 장관의 미국 출발을 앞두고 이웃의 충주여고 학생들은 반 장관에게 미국 체류 중 사용하라며 특별히 제작한 복주머니와 함께 꽃다발을 전달했는데 이 선물을 반 장관에게 대표로 전달한 사람이 바로 당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던 유순택 여사였다. 그러고 보면 인연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생에 있어 그 짧은 한순간에 반 장관의 안팎으로 미래는 결정된 것이다.

반 장관과 부인 유순택 여사는 그렇게 인연을 쌓아 결혼을 했고 43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생의 동반자로 한길을 걷고 있다. 결혼 직전 유순택 여사의 어머니는 딸을 불러 이런 당부의 말을 했다고 한다. “남자가 해지기 전에 집에 오는 것은 직업이 없거나 큰 병을 앓고 있을 때이니 반 서방이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말아라” 유순택 여사는 어머니의 당부를 결혼 기간 내내 잊지 않았고, 늘 조용한 내조로 남편이 마음 놓고 업무에 매진할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도왔다. 반 장관이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각 언론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 중이지만 유 여사는 밖으로 나서지 않고 반 장관의 내조에만 전념하고 있다.

반 장관과 유순택 여사는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맏딸 선용씨(36)는 현재 아시아재단 사업부장으로 근무 중이고, 막내 딸 현희씨(31)는 유엔아동기금(UNICEF) 케냐 사무소에서 국제기구초급전문가(JPO)로 일하고 있다. 반 장관의 딸들은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짓는 아버지 때문에 모두 비밀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반 장관이 차관과 비서관에게 업무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딸들의 결혼식을 몰라야 한다며 비밀에 부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딸 선용씨 밑으로는 아직 결혼 안 한 맏아들 우현씨(33)가 있다. 아들 우현씨는 현재 미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은 2억원의 연봉에 국가원수 대접을 받는 자리
유엔 헌장에 정해진 임기는 5년이지만 관례상 연임도 가능

40여 년 품어온 외교관의 꿈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뉴욕 맨해튼 중심 유엔본부 사무총장 집무실에서 1년에 단 1달러 ‘임대료’를 내고 연봉을 2억원 넘게 받으며 국가원수의 대접을 받는 유엔 사무총장. 우리의 반 장관이 그런 유엔 사무총장 집무실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1945년 유엔 출범 후 지금까지 사무총장을 지낸 인물은 코피 아난 현 사무총장을 포함해 모두 7명이다. 그 가운데 단임에 그친 사람은 이집트 출신의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총장이 유일하고, 그 밖에 역대 여섯 명의 총장이 총장 직을 한 차례씩 연임한 바 있다. 관례상 살펴본다면 반기문 장관도 원래 유엔 헌장이 정한 총장 임기는 5년이지만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의 자리를 지키게 될 공산이 크다.

유엔 사무총장의 공식 연봉은 22만 7천2백54달러로 우리 돈으로 약 2억원 정도다. 1997년 이래 한 번도 인상된 적이 없는 이 금액은 현 노무현 대통령(1억 6천1백42만원)보다는 많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연봉(40만 달러)보다는 적다. 그러나 사무총장 연봉은 정해진 금액 이외에 개인 활동을 위한 판공비와 경호 비용 등 추가로 지급되는 돈이 많아 실제로는 이보다 높은 3억원가량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또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 최고의 외교관으로 국제사회에서 국가 원수 내지는 행정수반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된다. 이 같은 예우는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유엔을 하나의 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 별도 보안 검색 없이 각국의 공항을 드나들며 외국을 방문할 수 있는 외교관 이상의 면책특권이 부여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밖에 사무총장이 지닌 권한은 또 있다. 일단 총회가 정한 규칙에 따라 1만6천 명의 사무국 직원을 임명할 수 있다. 산하기관까지 포함하면 총 4만 명에 대한 인사권을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또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내 모든 기관과 협의하며 권고할 수 있는 권한과 국제분쟁 예방을 위한 조정과 중재 업무도 맡는다.

내년 1월 1일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가 시작되면 반 장관은 한국을 떠나 미국 맨해튼 지역에 자리한 유엔 소유 사무총장 관저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업무 특성상 외국 출장이 잦을 수밖에 없다. 반 장관은 임기 중 세계 각국을 돌며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활동을 펼치게 된다.

반 장관은 당선의 기쁨을 만끽할 새가 없다. 당장 북한의 핵실험 파문을 비롯해 차기 유엔 수장으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다르푸르 사태, 이란 핵문제, 중동 평화 정착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뒤로 미뤄둘 수가 없는 형편이다. 최근 들어 평화유지군(PKO)의 성추문 사건과 이라크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을 둘러싼 비리 등으로 상처 입은 유엔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일도 그가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저력을 믿고 있다.

어린 시절 영어 신동으로 불리던 소년이 커서 이제 지구촌 평화기구의 수장으로 우뚝 섰다. 전세계의 평화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다시 한번 전세계인의 마음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글 / 김경은 기자(뉴스메이커)·최은영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외교통상부 제공

출처 : 솔로몬의 열정혁신아카데미
글쓴이 : 열정 장진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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